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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58> 쿠빌라이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20-11-24
  • 조회수 : 509

대원 제국 세운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1215~1294)는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로 징기스칸의 손자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대원 제국을 세웠다. 고려를 복속시키고 버마, 일본 등을 침공했다.

 

1215년 징기스칸의 막내 아들인 톨루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 몽케는 1251년 4대 황제에 취임했다. 쿠빌라이를 막남한지(莫南漢地) 대총독으로 임명했다. 쿠빌라이는 베이징에서 정북으로 250킬로 떨어진 다륜현의 금련천(金蓮川)을 본거지로 삼았다. 남송 정벌을 위해서 우선 운남(雲南)과 대리(大理)에 대한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쿠빌라이의 신중한 행보에 화가난 몽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사천쪽으로 남하했다. 무더운 날씨와 역병에 시달린 끝에 1259년 사천 조어산에서 사망했다.

 

몽케의 급서로 차기 황제를 둘러싼 권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수도 카라코룸에는 막내 동생 아리크 부케가 있었다. 쿠빌라이는 개평부로 돌아와 쿠릴타이를 열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260년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정하고 아리크 부케를 공격해 4년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군사력과 물자조달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쿠빌라이의 승리였다. 도읍을 연경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이름짓고 1271년에는 주역에 입각해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했다.

 

쿠빌라이의 당면 과제는 남송의 정벌이었다. 1266년 남송의 이종이 재위 40년만에 사망했다. 이종의 조카인 조기가 재상 가사도의 지원으로 즉위하니 도종이다. 원나라 군대는 요충지 양양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수비군을 지휘한 여문환의 거듭된 지원 요청에도 가사도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양양은 함락되고 3년 후 1279년 남송은 멸망했다. 1275년 남송이 무호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왕조의 운명이 사실상 결정되었다. 원군을 이끈 바얀은 남송의 공종 등 왕족을 붙잡고 대도로 개선했다.

 

대도 천도를 계기로 중앙 기구를 정비했다. 국정의 중심 기관인 중서성, 군정을 담당하는 추밀원, 감찰기관인 어사대를 설치했다. 민정‧군사‧감찰을 담당하는 세 기관을 황제에게 직속시킴으로써 전통적인 황제 통치 방식을 따랐다. 또한 하북 지방에서 세력을 행사하던 한인세후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군민겸령제(軍民兼領制)를 철폐해 주군의 관직을 한인세족이 독점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선법(銓選法)을 개정해 중서성 이부가 문관을 추밀원이 무관을 임명하는 권한을 갖도록 하였다.

 

고려를 복속시킨 후 일본과 수교를 희망했지만 일본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1174년 1차 일본 원정을 단행했다. 몽고‧고려‧한군으로 구성된 2만6천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폭풍을 만나 자멸했다. 소위 문영지역(文永之役)으로 불리는 사건이었다. 1281년 2차 일본 원정에 나섰다. 고려군 4만, 한군 10만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태풍으로 기타큐슈 바다에서 궤멸되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홍안지역(弘安之役)으로 부른다.

 

쿠빌라이 치세에 몽고 제국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몰락한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두가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다. 오고타이의 5남 카시의 아들인 카이두는 아리크 부케의 계승을 선언하고 쿠빌라이에게 도전했다. 쿠빌라이는 1277년 장군 바얀을 보내 카이두를 공략하였다.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고를 지배하는 일족들과 결탁해 여러 차례 쿠빌라이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쿠빌라이의 종주권에 도전하는 싸움을 계속했다.

 

쿠빌라이 말년에는 3번에 걸친 베트남 원정에 나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계속된 몽고 일족과의 종주권 싸움과 해외 원정으로 국력이 소진되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상인들의 교역을 장려했다. 색목인(色目人)이 관계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사랑한 황후 차비가 1281년 죽고 1286년 황태자 친킴마저 죽자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처와 두 딸에게 정치를 일임하였다. 1294년 2월 대도 황궁에서 79세로 병사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쿠빌라이는 포용의 정치를 추구했다. 불필요한 살상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몽고의 전통을 결코 잊지 않은 몽고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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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일자 : 2020-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