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열린총장실

[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59> 유병충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20-12-01
  • 조회수 : 593

대원 제국 통치체계 세운 쿠빌라이 참모

 

유병충(劉秉忠, 1216~1274)은 하북성 형주(邢州) 사람으로 자는 중회고 자호는 장춘산인이다. 몽고의 쿠빌라이를 보좌해 대원제국 설립과 제도 구축에 기여했다.

 

금나라에 출사해 형대절도부영사가 되었다. 하루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우리 집안은 관직을 이어왔는데 나는 서기에 머물러야 하나? 대장부로 태어나서 때를 못만나면 물러나 기다렸다 일어설 따름이다.” 사직하고 무안산에 은거했다. 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은 자총(子聰)이었다. 주역을 공부해 일가를 이루었다. 해운선사 추천으로 1242년 쿠빌라이 참모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총서기(總書記)로 불렀다. 여러명의 인재를 쿠빌라이에게 추천했다. 곽수경은 천문 지리 수학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왕순은 산문과 천문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유병충은 쿠빌라이의 이상적인 참모로 묘사되어 있다. 시, 서, 화에 뛰어났으며 수학자,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천문가들과 협업해 수시력(授時曆)이라는 달력을 고안했다. 몽고 황실의 음악과 각종 의례를 마련하는데도 솜씨를 보였다. 유병충의 실무적 재능과 풍부한 경험이 쿠빌라이가 실용적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기여했다.

 

몽고 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자 관료층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법률 시스템과 합리적인 조세 제도를 도입토록 건의했다. 중국의 전통에 따라 전 왕조인 금사(金史) 편찬도 제안했다. 쿠빌라이는 대부분의 제안을 수용했지만 과거 시험 부활에는 반대했다.

 

쿠발라이의 대리(大理) 원정에 수행했는데 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과 재물 약탈을 막았다. 주민을 몰살하는 도성(屠城)을 백지화하였다. 북경에서 약 200킬로 떨어진 몽고 초원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개평부(開平府)로 불리는 수도로 후일 상도(上都)로 바뀌었다. 그의 건의에 따라 개평부를 과거 중국의 수도를 모델로 삼아 건설했다. 유목 왕조에서 정주 왕조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원 제국을 세웠다. 연경을 수도로 삼았다. 중국 경영을 위한 체제 구축이었다. 국정의 중추 기관인 중서성, 군정을 관장하는 추밀원, 최고 감찰기관인 어사대를 설치했다. 유병충은 중서성을 담당하고 태보(太保)가 되었다. 관리의 직급과 급여를 정비해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무역을 장려하고 상인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영지내 지폐 유통을 추진하였다. 쿠빌라이는 지폐 사용을 추진한 최초의 몽고 지도자였다. 금‧은‧동으로 된 경화(硬貨)가 북중국에서 널리 활용되도록 쿠빌라이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통화량을 적절히 통제해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도로와 역참(驛站) 건설에 적극 나섰다. 쿠빌라이 통치 말기까지 1400개 이상의 역참이 중국 전역에 설치되었고 효율적인 우편 기능을 담당했다.

 

대원 제국의 수도인 대도(大都) 건설은 유병충이 주역이었다. 주역에 나오는 이상적인 수도 계획을 참고해 건설했다. 야흑질이라는 이슬람 건축가가 설계를 담당했는데 도시의 관념과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중국적이었다. 쿠빌라이는 대도 건설을 통해 자신이 중국의 전통과 원칙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원 제국의 수도인 대도(大都) 건설은 유병충이 주역이었다. 주역에 나오는 이상적인 수도 계획을 참고해 건설했다. 야흑질이라는 이슬람 건축가가 설계를 담당했는데 도시의 관념과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중국적이었다. 쿠빌라이는 대도 건설을 통해 자신이 중국의 전통과 원칙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1274년 병사했는데 조국공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인 장춘집이 전해진다. 유병충은 늘 부귀를 뜬 구름처럼 생각했다. 하루는 쿠빌라이가 그의 공을 인정해 백금 천냥을 하사했다. 그는 말하기를 “저는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으며 운이 좋아 황제의 인정을 받았는데 금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쿠빌라이가 친척에게라도 주라고 하자 거절하지 못하고 친척, 친구, 부하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쿠빌라이의 중국 통치가 중국식 전통인 도덕과 실용의 이상적 결합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보좌한 참모였다.
 

 

 

 

 

 

비밀번호 :
· 수정일자 : 20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