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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57> 몽케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20-11-17
  • 조회수 : 518

몽고제국 4대 황제ㆍㆍㆍ남송 정벌 중 급사 

 

몽케(蒙哥, 1208~1259)는 몽고 제국의 제4대 황제로 시호는 헌종(憲宗)이다. 중국을 정벌해 대리(大理)를 멸망시키고 서방원정을 통해 아바스 왕조를 제압했다. 남송 토벌 중 병사했다. 징기스칸의 막내 아들인 톨루이의 장남이다. 친형제로는 쿠빌라이, 아리크 부케, 훌라구가 있다. 3대 황제 정종 구유크가 과도한 음주와 황음으로 1248년 급사했다. 징기스칸의 장손인 바투 가문은 톨루이 가문과 함께 쿠릴타이를 열어 몽케를 황제로 추대했다. 헌종 몽케는 1251년 7월 정식으로 즉위했다. 몽케는 결단력이 있고 유능했으며 저돌적인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즉위하자 반대파를 철저히 숙청했다.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정종황후를 강에 던져 죽였다. 자신과 황제자리를 다툰 오고타이의 손자 시라문, 정종의 아들 호자, 낙 등도 숙청했다. 오고타이, 차가타이 양 가문을 철저히 제압했다. 처형된 유력 인사가 77명에 달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맹우 바투와는 긴밀히 유대해 파미르 고원 서쪽의 통치권을 바투에게 사실상 일임했다. 오고타이 가문은 몰락했다.

 

오고타이, 구육 시대를 거치면서 느슨해진 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동생인 쿠빌라이에게 중국 등 동방 정벌을 명하였다. 그를 막남한지(莫南漢地) 대총독으로 임명했다. 막내인 훌라구에게는 이란과 중동 지방의 경략을 명하였다. 이를 위해 몽고 본토에서 10호당 2명씩의 젊은이를 전사로 차출하였다. 무장인 샤릭 노얀에게는 인도 방면으로의 진공을 지시했다. 샤릭 노얀이 황제에게 언제까지 주둔해야 하느냐고 묻자 몽케는 “영원히”라고 답했다. 몽고 세계 제국을 구축하려는 그의 야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친동생인 쿠빌라이, 아리크 부케, 훌라구와의 형제 정권을 지향했다. 동쪽으로는 남송, 서쪽으로는 서아시아와 유럽을 목표로 하였다.

 

몽케는 국도 카라코룸에 중앙정부를 설립해 신임하는 망구사르를 재상으로 기용했다. 몽고 이외의 제국을 셋으로 나누어 금나라때 운영되었던 행상서성(行尙書省)을 두었다. 중원과 신장 및 중앙아시아에 행상서성을 설치했다. 몽케는 몽고주의자로 몽고의 전통을 지키는 것에 사명감을 가졌다. 사치를 멀리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겼다. 거북점이나 대오리점을 믿는 무속적 성향이 강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골육을 의심하고 시기했다는 기록이 <신원사>에 남아있다.

 

1255년 훌라구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를 공격해 몽고족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압박했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이 이를 거부하자 바그다드를 초토화 하였다. 1258년 2월 아바스 왕조가 항복하자 무차별 학살에 나서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8만명의 이슬람 신도가 학살당했다고 전해진다.

 

남송 경략을 담당한 쿠빌라이는 남송의 가사도 군을 압박했다. 목표는 양자강 중류의 거점도시인 악주(鄂州)였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운남(雲南)과 대리(大理)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1253년 운남 원정이 성공하자 쿠빌라이는 무장인 우랑카타이에게 전선을 맡기고 1254년말 본거지인 금련천 초원으로 복귀했다. 남송 정벌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쿠빌라이의 결정이었다. 성미 급한 몽케는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느꼈다. 감사단을 파견해 쿠빌라이가 기용한 한인관료를 처형하는 등 견제에 나섰다. 결국 1257년 봄 몽케는 스스로 남송 친정 계획을 발표했다. 단기 결전으로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리에 통증이 생긴 쿠빌라이에게는 쉬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천으로 진군한 몽케군은 무더운 더위로 곤욕을 치뤘다. 그 와중에 전염병이 급습했다. 1259년 8월 몽케는 사천 조어산에서 급사했다. 남송군으로부터 입은 상처가 재발해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복동생인 무케로부터 황제의 사망이라는 급보를 접한 쿠빌라이는 남송과의 싸움을 뒤로하고 급히 몽고로 회군했다. 이로써 몽고 본토를 지키고 있는 동생 아리크 부케와 쿠빌라이 간의 권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최후의 승자는 쿠빌라이였다. 군사력과 물자조달에서 유리한 쿠빌라이는 1264년 아리크 부케의 항복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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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일자 : 2020-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