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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55>오고타이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20-11-03
  • 조회수 : 561

통치체제 확립한 몽고 제국 2대 황제

 

오고타이(1185~1241)는 몽고 제국의 제2대 황제다. 부친 징기스칸의 뒤를 이어 몽고 제국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대외 정벌 사업을 활발히 추진했다.

 

징기스칸의 3남으로 너그러운 인품으로 장남 주치와 차남 차가타이를 제치고 후계자로 발탁되었다. 일찍부터 부친의 대외정벌에 참여했다. 서아시아 원정 때에는 호라즘 왕국의 수도 우르겐치성을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오고타이한국(汗國)을 세워 그 시조가 되었다. 옛날 나이만 부족이 다스리던 땅으로 준가리아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1214년 징기스칸이 금나라의 연경을 공략할 때 야율초재(耶律楚材)라는 일대의 영재를 얻었다. 야율초재는 징기스칸이 하늘이 몽고에게 준 선물이라고 칭찬할 정도로 뛰어난 경륜을 갖춘 인물이었다. 야율초재 없는 오고타이의 치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징기스칸 사후 2년 대쿠릴타이에서 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오고타이는 신원사(新元史)에서 “관대하고 너그러워 군주의 도량이 있다”고 평가될 정도로 온화한 인물이었다. 주치와 차가타이는 서로 배다른 형제인 까닭에 매우 사이가 나빴다. 둘 중 누구를 후계자로 정해도 징기스칸 사후 가문의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카간으로 추대되는데 막내인 톨루이 가문의 반대가 있었으나 중신 아율초재가 중재에 나서 오고타이의 집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고타이의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오고타이의 치세 중에 징기스칸의 오랜 꿈인 금나라 멸망이 이루어졌다. 1234년 개봉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1234년 정월 금나라의 애종은 개봉을 떠나 채주로 도주했는데 결국 자살했다. 건국으로부터 120년 만에 멸망했다. 원래 몽고군은 개봉을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을 모두 죽일 계획이었다. 도성(屠城)이라 불리는 대탄압인데 야율초재의 반대로 대량학살과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오고타이가 50대에 일찍 생을 마감한 것은 술과 관련이 깊다. 매일 과음으로 건강을 해쳤다. 야율초재의 간언으로 하루 석 잔으로 줄였지만 상당히 큰 잔이어서 과음은 여전했다. 중신들이 술에 취해 그 앞에서 실수해도 용서해 주는 너그러움이 있었다.

 

아율초재, 전진해 등을 기용해 중앙정부의 통치기구를 정비했다. 점령한 땅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해 속령의 통치를 원활히 하였다. 오논강변에 수도 카라쿠룸성을 건설해 속령을 통치하는 중앙집권 방식을 강화했다. 금나라가 다스리던 하북 지방에는 한인세후(漢人世候)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의 제도와 관습에 익숙지 않은 몽고 입장에서 이들의 협력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협력의 대가로 징세권이나 관리임명권을 요구해 갈등이 많았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의 건의에 따라 십로과세소(十路課稅所)를 설치해 한인세후의 징세권을 넘겨받았다. 오고타이는 몽고 왕족과 귀족에게 땅을 나눠주는 봉건 통치 방식을 희망했다. 아율초재는 이렇게 하면 왕족과 귀족의 분열이 촉진되어 중앙의 통치가 어려워진다고 건의해 이를 백지화했다.

 

1241년 재위 13년만에 오고타이가 사망했다. 중국과 달리 장자 승계 원칙이 확립되지 않아 후계 싸움이 불가피했다. 막내동생 톨루이의 장남 몽케, 본인의 장남 구유크, 셋째 아들 구츠의 아들 시라문의 삼파전이었다. 그러나 구유크는 징기스칸 집안의 장손인 바투와 사이가 나빴다. 제2차 서방 원정 때 총사령관인 바투와 구유크가 사사건건 충돌했다. 오고타이 사후 부인 투라카나가 4년 간 섭정을 했다. 1246년 투라카나는 대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그녀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구유크를 제3대 황제로 밀었다.

 

구유크는 정종(定宗)으로 즉위했다. 정종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주치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양 측의 격돌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지나친 과음과 황음으로 구유크가 1248년 즉위 3년 만에 급사해 왕족 간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동쪽으로 이동한 바투는 쿠릴타이를 열어 톨루이가의 몽케를 카간으로 추대했다. 몽골 제국의 3대 황제로 헌종(憲宗)으로 불린다. 정종황후는 강에 던져졌고 몽케와 경합한 시라문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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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일자 : 202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