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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56> 야율초재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20-11-10
  • 조회수 : 581

법령ㆍ제도 만들어 몽고제국 초석 다진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는 금나라 연경 출신으로 자는 진경 호는 잠연거사다. 몽고 제국 체제 구축과 금나라 정벌에 크게 기여했다.

 

요나라 왕족 출신으로 상서우상을 지낸 야율리의 아들이다. 3세때 부친이 죽어 모친 양씨로부터 학문을 배워 천문, 지리, 율력, 불교, 노장사상 까지 폭넓게 공부했다. 금나라말 출사해 좌우사원외랑이 되었다. 1215년 몽고군이 연경을 점령했다. 징기스칸은 그를 발탁했다. 원사(元史)에는 “신장이 8척에 수염과 목소리가 아름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징기스칸이 “금은 요나라의 원수인데 짐이 그대를 위해 원수를 값아줄까?”라고 말했다. 야율초재는 답하기를 “신의 집안은 금나라를 섬겼습니다. 어찌 감히 복수하겠습니까.” 징기스칸은 크게 감동해 신임하게 되었다. “긴 수염을 가진 사람”으로 부르며 그의 계책을 폭넓게 수용했다.

 

징기스칸이 보낸 사절단이 호라즘 왕국에서 암살되자 1219년 서역 정벌이 시작되었다. 7년이나 지속된 정벌에 야율초재도 참여했다. 저항하는 나라는 박멸하는 것이 초원의 법도였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바그다드 등지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야율초재는 희생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깊은 불심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이 죽자 후계자 분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몽고를 지키고 있던 막내 톨루이가 최대 장애물이었다. 초재는 톨루이에게 대칸 자리를 양보하도록 설득했다. 오고타이 형 차가타이 역시 “당신이야말로 사직을 지키는 공신이다”라며 동생의 즉위를 받아들였다.

 

1229년 3남인 오고타이가 2대 황제로 즉위했다. 일찍이 징기스칸은 아들에게 “야율초재는 하늘이 우리 집안에 내려준 보물이다. 모든 국정을 맡겨라”라고 지시했다. 초재를 재상에 기용했다. 몽고에 투항한 시모한토프 집단이 하북의 양민을 죽이고 농지와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야율초재는 폭도를 체포해 16명을 공개처형해 질서를 확립했다. 시모한토프는 이후에도 음해공작을 벌였지만 오고타이는 초재가 진실로 관후한 인물이라며 이를 일축했다.

 

몽고 군사조직을 개편해 군과 민을 분리토록 하였다. 주군의 관리는 민정을 담당하고 만호부는 군정을 총괄토록 하였다. 1234년 개봉을 점령해 금나라가 멸망하자 변경의 주민을 대거 학살하는 도성(屠城) 문제가 제기되었다. 초재는 주민을 모조리 죽여버리면 얻는 바가 없다는 논리를 펴 금나라 왕족인 완완씨로 죄를 한정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였다. 이로써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당시 개봉에는 약 147만명이 거주했다니 초재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겠다.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금나라가 다스린 하북 지방에는 한인세족(漢人世族)이 여전히 큰 권력을 행사했다. 몽고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협력이 필요했는데 반대급부로 인사권과 징세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초재의 건의에 따라 십로과세소(十路課稅所)를 설치해 직접 통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교를 적극 권장했다. 거대한 중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자면 유학을 습득할 인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많은 한인 학자들이 원나라에 출사했다. 한인의 反몽고 정서를 누그러트리고 유능한 한인 관료집단을 통치 기구에 흡수해 행정의 효율성을 높였다.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용되도록 노력했다. 몽고 초원의 논리가 적용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무질서가 지배하게 된다. 초재는 오고타이를 설득해 각종 법령과 제도를 만들어 엄격히 집행되도록 함으로써 법의 지배와 관료의 폭정을 막는데 노력했다.
  1244년 5월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가 나라 재정의 절반을 착복했다는 투서가 들어왔다. 조사 결과 거문고 등 악기 10여개, 몇몇 고서화, 서적 수십권이 전부였다고 한다.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 태사, 상주국, 광연왕으로 추봉되었다. 신원사(新元史)에는 “중원의 백성이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그의 덕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율초재는 겸손과 절제로 몽고 제국의 초석을 닦은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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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일자 : 2020-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