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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200> 조보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19-10-01
  • 조회수 : 549

태조 조광윤 도와 북송 건국에 공헌

조보(趙普, 922~992)의 자는 칙평으로 유주 계현 사람이다. 태조 조광윤을 도와 북송 건국에 공헌했다. 태종 조광의때도 두 차례 재상을 지내 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조광윤이 후주의 군관으로 활약할 때 인연을 맺었다. 후주의 세종 시영이 천하통일 사업의 일환으로 남당을 공격할 때 조광윤의 부친 조홍은도 출정했는데 과로로 사망하였다. 군사판관으로 파견된 조보가 조홍은을 돌봐준 일을 계기로 친교를 맺게 되었다. 959년 세종이 급사하자 7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조보는 조광윤의 동생 조광의 등과 짜고 수도 개봉 주변 진교에서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어린 황제에 불안을 느낀 군부, 관료 집단이 합작한 진교병변(陳橋兵變)이었다. 960년 태조는 그를 우간의대부, 추밀직할사에 발탁했다. 태조의 즉위에 소의절도사 이균과 회남절도사 이중진이 반대했다. 조보는 두 세력을 진압하는데 종군했다. 송나라를 토멸하자는 이균 등의 격문에도 불구하고 호응하는 자가 적었다. 태조는 피를 흘리지 않고 점진적으로 전국을 통합해 나갔다. 병부시랑, 추밀학사를 거쳐 962년 추밀사와 검교태보에 임명되었다.

 

건덕 2년(964년) 범질이 사퇴하자 재상에 올랐다. 건국 초 태조와 조보는 안으로는 조정의 안정에 밖으로는 통일사업에 힘을 모았다. 그는 다른 조정 중신에 비해 학문이 다소 부족했다. 문치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북송 재상으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 논어의 절반만 읽어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로 풍부한 경험과 경륜으로 무장한 조보의 자신감을 표현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정권 초기 태조 옹립에 공을 세운 장군들의 군권을 악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군권 장악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술잔을 돌려 병권을 해제했다”는 의미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통해 중앙군인 금군(禁軍)의 힘을 키웠다. 장군들은 지방의 절도사로 나갔지만 당나라때 같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중앙에서 통판(通判)을 직접 파견해 전곡 업무를 담당하고 토지세와 소금세 등 징세 업무를 전운사가 담당토록 해 절도사의 힘을 약화시켰다. 경찰 업무도 중앙에서 내보낸 현위(縣尉)가 담당토록 했다. 문관으로 지주(知州)를 삼아 문관 중심의 제도가 정착되도록 하였다. 태조 초기 숙위나 절진병권 폐지에도 깊이 관여했다. 왕조 초기 주요 제도나 조치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최대 현안은 통일 사업의 방향이었다. 태조는 산서성 태원 공략에 관심이 있었다. 조보는 태원은 서쪽으로 서하에 북쪽으로 거란과 맞붙어 있어 태원 공략시 양 나라와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 우려감을 표했다. 결국 상대적으로 약한 남쪽 나라를 먼저 공략하는 선남후북(先南後北) 전략을 채택했다. 전국의 통일은 다음대인 태종때 완성되었다. 

성격이 집요해 한번 시도하면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한번은 황제에게 사람을 추천했는데 가납치 않았다. 이튿날 또 청하니 황제가 노해 서류를 찢어버렸다. 조보는 찢어진 서류를 풀로 붙여 다시 올렸다. 태조가 결국 승인하였다. 공을 세운 신하를 승진시키는 안을 올렸지만 태조가 개인적으로 싫어해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된 요청에 황제는 “내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소”라고 하문했다. 조보는 답하기를 “상벌은 공평해야 하거늘 황제의 감정에 사사로이 좌우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태조는 승진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사를 다른 중신들과 깊이 상의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올리는 글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커다란 독 속에 쳐넣고 태워버렸다. 독선적이고 안하무인격 처신으로 많은 중신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태조 말년 황제의 신임을 잃고 재상 직위에서 파면되어 하양삼성절도사로 나갔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자 다시 불사조처럼 재상직에 복귀해 정사를 좌지우지하였다. 992년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조보는 정사를 과감성 있게 결단하였다. 진정으로 사직지신이다”고 애통해 하였다. 시호는 충헌이고 위국공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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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일자 : 2019-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