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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08>범중엄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19-11-26
- 조회수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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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인종때 명신... 개혁정책 앞장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자는 희문(希文)이며 소주 오현 사람이다. 북송 인종때의 명신이다.
대중상부 8년(1015년) 진사과에 급제했다. 급제 이후 흥화현령, 비각교리, 진주통판, 소주지주를 역임했다. 직언을 자주해 여러 차례 관직에서 배척되었다. 1040년 한기와 함께 섬서경략안무초토부사가 되어 둔전구수(屯田久守) 정책을 실시해 북서쪽 변경을 안정시켰다. 경력 3년(1043년) 참지정사가 되어 경력변법(慶曆變法)을 추진했다. 요와 서하에 대한 과도한 재정지출, 방만한 관료기구로 인해 재정적자가 급증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십사소(十事疏)를 올렸다. 관리의 승진 제도를 엄격히 할 것, 과거제도를 엄격히 실시할 것, 지방관을 잘 선정할 것, 농업과 누에고치 생산을 장려할 것, 공전(公田)을 고르게 할 것, 부역을 줄일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1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변법이 좌절되자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빈주, 등주, 항주, 청주 등지를 전전했다. 1052년 영주지현에 임명되어 부임 중 병으로 사망했다. 병부상서와 초국공에 추증되었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을 나중에 기뻐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있는 천하의 명언이다. 주자는 그를 유사 이래 최일류 인물로 평가했다.
진사 합격 후 광덕군의 사리참군으로 부임할 때의 일화다. 옥사처리 문제를 놓고 지방장관과 의견이 달랐다. 장관은 크게 화를 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귀가하면 늘 오간 논쟁의 시말을 병풍 위에 기록해 놓았다. 임지를 떠나게 되었을 때 한필의 말 외에는 개인 재산이 없었다. 말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 걸어서 임지를 떠났다.
안수가 남경 유수로 재직시 범중엄이 모친상을 당해 남경 응천부 성내에서 복상 중이었다. 안수는 그에게 부학(府學)을 담당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학생 기숙사에 거주하며 학생들을 훈독했다. 교육에는 절도가 있었고 매사를 솔선수범했다. 밤에도 학생들이 독서하도록 규칙을 정했다. 식사시간, 취침시간도 준수토록 감독했다. 학생들에게 시제를 주어 시부(詩賦)를 짓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사방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훗날 북송 조정에서 문명을 떨친 사람 상당수가 그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복상 중 재상 왕증에게 상서해 정치 득실과 민생 현안에 관해 의견서를 올렸다. 내용이 자세해 무릇 만 여자에 달했다. 왕증이 이를 보고 범중엄을 높이 평가해 요직에 발탁했다. 하루는 동지에 조회 의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예관이 수렴청정을 하는 장헌태후에게 잘 보이려고 황제가 중신을 거느리고 태후에게 술잔을 올려 장수를 축원토록 요청했다. 범중엄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상소했다. 중신 안수가 대경실색해 꾸짖었다. 그는 정색하며 말하기를 “저는 공의 은혜를 입어 항상 그에 어긋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공께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뜻하지 않게 오히려 정론(正論)으로써 공에게 죄를 얻게 되었습니다.” 안수는 부끄러워 응답하지 못하였다.
장헌태후에게 상소해 인종의 친정을 주청하였다. 이로인해 산서성 영제현 통판으로 좌천되었다. 장헌태후가 죽자 중앙에 복귀했다. 많은 중신들이 친정에 나선 인종에게 잘 보이려고 장헌태후의 실정(失政)을 들추어내 공격했다. 그만이 홀로 “태후께서는 선제의 부탁을 받아 폐하를 지키셨습니다. 마땅히 그 사소한 잘못은 덮어두고 큰 은덕을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고 주청했다.
그가 참지정사가 되어 추밀부사 한기와 부필과 함께 개혁에 앞장섰다. 각 지방의 지방장관격인 감사(監司) 중 무능한 자들을 대거 교체하려 하였다. 무능한 감사를 가려내 그 성명위에 붓으로 표시를 했다. 부필이 말하기를 “어른께서는 한번 붓으로 표시하는 것이지만 이로 인해 한 집안이 통곡하게 되는 것은 아십니까?” “한 집안이 통곡하는 것이 한 지방 전체가 통곡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라고 답하며 표시된 전원을 교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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