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열린총장실

[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53>문천상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20-10-20
  • 조회수 : 572

원나라에 저항 죽음 택한 남송말 시인·관리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은 강서성 길수현 출신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남송말의 대표적 시인, 관리로 몽고의 원나라에 끝까지 저항해 죽음을 택한 대표적 애국지사다.
 

1255년 20세 진사시험에 수석 합격한 수재다. 그러나 재상 가사도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이라 소신을 펴지 못한채 지방관으로 근무했을 따름이다. 남송이 몽고의 침략으로 망국의 위기에 직면하자 그의 진가가 나타났다. 원나라를 세운 몽고의 쿠빌라이는 본격적으로 대남송 토벌에 나섰다. 남송 공략에 최대 걸림돌은 양양이었다. 1273년 정월 양양 주변의 번성을 함락해 양양이 고립되었다. 재상 가사도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결국 양양은 함락됐다. 수비 대장인 여문환은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 남쪽의 조정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이어서 악주(현 무창)를 함락시켜 양자강 상류를 차지하자 남송의 멸망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각지에서 의용군이 일어나자 문천상은 1만의 병사를 모아 수도 임안으로 달려갔다.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는 상주를 함락시키고 항주성을 포위했다. 남송 조정은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우승상 겸 추밀사인 문천상을 바얀에게 보냈다. 바얀은 그의 재주를 높이사 원에 귀순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강제로 억류해 버렸다. 연경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진강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게릴라전을 계속하였으나 광동의 조주에서 1278년 원의 장군 장홍범에게 체포되었다. 장홍범의 투항 권유에 “인생은 예부터 죽음을 피할 수 없거늘 오직 일편단심으로 역사를 비추리”라는 비장한 시로 남송에 대한 충성을 분명히 했다.
 

장홍범은 애산으로 쳐들어가 1279년 2월 장세걸, 육숙부, 어린 황제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육수부와 장세걸 모두 익사했다. 그가 남긴 감유(感有)라는 시에는 당시의 정황이 다음과 같이 표현돼있다. “물 건너 남해상에 이르니 시신이 흩어져 마치 삼(麻)과 같네. ‧‧‧ 남아 천년의 뜻. 나의 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
 

연경으로 압송되는 중 8일간 단식했으나 그만두었다. 단식과 같은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송 신하의 기개를 보여주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장홍범은 문천상의 투항을 재촉했다. 원에 투항하면 재상의 자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회유에 “왕조가 망하는 것을 신하로서 지키지 못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저질렀다. 어찌 부귀영화를 바라겠는가”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쿠빌라이는 감옥에 있는 그를 불러 원에 귀순할 것을 종용했다. 재상을 원하면 재상을 줄 것이고 재상이 싫으면 추밀원을 담당토록 하라고 권유했다. 문천상은 오직 죽기만을 원한다고 답했다.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원은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사치스런 연회를 계속했다. 그러나 호화로운 침상을 거부한채 맨바닥에 앉은채로 밤을 꼬박 지새웠다. 쿠빌라이는 동생 문벽과 폐제인 공종까지 동원해 전방위 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뜻은 요지부동이었다. 지하감옥의 토굴로 옮겨졌지만 기세가 꺾이지 않은채 유명한 정기가(正氣歌)를 지었다. 2년 동안의 지하감옥 생활 중 병부상서를 지낸 왕덕옹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인 구명운동에 나섰다.
 

1282년 12월 쿠빌라이는 그를 불러 마지막 설득을 하였으나 오직 죽음만을 원한다는 답만이 돌아왔다. 결국 시시라는 곳에서 처형되었다. 후일 사람들은 그곳에 문승상사(文丞相祠)라는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남쪽을 향해 절하고 죽음을 맞이하니 47세였다. 부인이 그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그 얼굴이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 쿠빌라이는 원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문천상이라는 일개 선비의 의지와 기개를 꺾지는 못했다. 아마도 충을 강조한 송대 주자학의 선비 정신이 문천상의 결연한 저항 뒤에 자리잡았던 듯하다.
 

문천상의 처형을 지켜본 쿠빌라이 황제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옛날부터 천년을 이어간 왕조는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의 자손들도 언젠가는 저런 운명이 되지 않을런지요” 원나라는 백년도 채 안되어 1368년 명나라의 주원장에 의해 멸망했다.

비밀번호 :
· 수정일자 : 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