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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251>원호문

  • 작성자:홍보실
  • 등록일2020-10-06
  • 조회수 : 606

도연명·두보 시풍 계승한 금나라 대표시인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의 자는 유지(裕之), 호는 유산산인(遺山山人)으로 산서성 태원 출신이다. 도연명‧두보‧소식‧황정견의 시풍을 계승한 금나라의 대표 시인이다. 특히 시성 두보의 시에 조예가 깊었다고 평가된다.

 

원호문의 선조는 선비족 탁발씨로 북위 효문제때 산서성 평성(현 대동시)에서 남쪽인 하남성 낙양으로 이주했다. 효문제가 적극 추진한 한화(漢化) 정책에 따라 성을 원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부친 원덕명은 여러번 과거에 낙방 후 고향에서 시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원호문은 아들이 없는 숙부 원격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 시문, 경전, 역사, 제가백가서를 두루 공부했다. 16세부터 과거에 응시했으나 계속 떨어졌다. 고향에서 떨어진 유산에서 공부했는데 이런 이유로 호를 유산산인으로 정했다.

 

선종 흥종 5년(1221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3년뒤에야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유림장, 국사원편수를 거쳐 진평, 남양, 내향 현령을 지냈다. 1225년 잠시 관직을 휴직하고 두보의 시를 다룬 두시학(杜詩學)을 저술했다. 1234년 금나라 수도 변경(현 개봉시)이 몽고에 함락되고 금왕조는 멸망했다. 몽고는 그를 체포해 산동성 요성에 유폐시켰는데 2년 후 풀려났다. 1239년 몽고의 쿠빌라이가 그를 가신으로 기용하려 하였으나 관직을 거부하고 낙향했다. 1257년 68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약 20년간 시를 짓고 책을 쓰는 선비의 삶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족이었지만 이민족인 금나라에서 태어나 관직생활을 했다. 금나라가 중국문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북위 선비 탁발씨 후손인 것이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선조중에는 당대의 유명 시인 원결(元結)이 있다. 이런 연유로 금에 대한 저항 의식이 적었다. 부친의 임지를 따라 산동‧산서 등으로 옮겨 살았다. 부친 사망 후 고향에서 복상 중 몽고족의 침공이 있었다. 1214년에는 몽고의 징기스칸이 직접 대군을 몰고 남하하기도 했다. 이 싸움에서 형 원호고가 전사했다. 이즈음 지은 시에 석령관 소견(石嶺關 所見)이 있다. 전쟁터의 상흔을 보여준 청년기의 작품이다.

 

8대 황제 선종은 수도 연경에서 변경으로 천도했다. 남천 결정은 하북, 산서에 사는 주민들에게 금왕조가 이들 지역을 포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군인 가족도 대거 이주시켰다. 몽고군이 갑자기 서역 원정을 가는 바람에 한동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가 1232년 남송과 협력하에 다시 변경을 포위했다. 그 전해 부인 장씨를 잃었다. 섬서의 봉상이 몽고군에게 함락되자 기양(岐陽)이라는 시를 지었다. 변경에서 최립의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을 장악했다. 좌우원외랑으로 최립의 공적비를 쓴 것으로 명예가 실축되었다. 금왕조의 마지막 황제 애제는 채주로 달아났다. 1234년 몽고와 남송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애종은 자살하고 왕조는 120년만에 멸망했다.

 

원호문은 문인으로서 금나라 문학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했다. 금나라 당대의 시집을 편찬했으니 유명한 <중주집>이다. 약 200명의 시인을 수록했다. 요성에서의 유폐 생활이 끝나자 관씨현으로 옮겨 서재를 야사정(野史亭)으로 칭하고 금나라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몰두했다. 명성이 자자한 그를 영입하려는 몽고의 노력이 적지 않았다. 1252년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를 만나 유교대종사(儒敎大宗師)의 칭호를 받았다. 만약 받지 않았다면 목숨 자체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말년에 은거하면서 20여년간 전란으로 상실되고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일들을 모으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임신잡편> <남관록> 등이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후일 금사(金史) 편찬시 상당부분 채택되었다.

 

원호문은 북방 문학의 거두였으며 금나라에서 원나라로 문학이 계승되는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 후일 일대문종(一大文宗)으로 평가받았다. 시뿐만 아니라 사(詞), 곡(曲)에도 모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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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일자 : 2020-10-06